[르포] 국회앞 불탄 버스정류장…격렬시위로 특권에 저항하는 인니 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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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일 넘는 시위로 전국서 7명 사망…자카르타서만 1천240명 체포
의원 주택수당 수령 사실 알려지며 민심 '폭발'…"최고 권력은 국민 손에"
불에 탄 자카르타 국회의사당 앞 버스정류장
(자카르타=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지난 1일(현지시간) 오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중심부 스나얀에 있는 국회의사당 앞 버스정류장이 며칠 전 시위대 방화로 불에 타 흉물로 방치돼 있다. 2025.9.2
(자카르타=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지난 1일(현지시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중심부인 스나얀에 들어서자 차창 밖으로 완전히 불에 탄 버스 정류장이 먼저 보였다. 평일에도 많은 승객이 모이는 곳이지만 뼈대만 남은 채 흉물이 돼 있었다.
8차선 대로 한가운데에 있는 흉물 주변을 광고판으로 둘러싸 가렸는데도 검게 그을리고 곳곳이 녹아내린 흔적은 며칠 전 시위가 얼마나 격렬했는지를 짐작하게 했다.
인근 경찰청 앞 버스 정류장 3곳과 고속도로 요금소 건물도 모두 불에 타 보수 공사를 서두르는 작업자들 손이 분주했다.
스나얀 국회의사당 앞 도로 갓길에는 콤파스, 누산타라TV, RTV 등 현지 매체 취재 차량이 줄지어 있었고, 정문 앞 트럭 확성기에서는 울분에 찬 목소리가 귀를 찢을 듯 새어 나왔다.
집회 연설하는 대학생 단체 관계자
(자카르타=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지난 1일(현지시간) 오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중심부 스나얀에 있는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민족학생운동(GMNI) 소속 학생들이 집회를 하고 있다. 2025.9.2
"내각, 의회, 사법부 부패를 청산하라. 경찰청장을 해임하고 경찰을 개혁하라."
인도네시아 민족학생운동(GMNI) 소속 학생 등 500명은 "최고 권력은 국민 손에 있다"고 쓴 손팻말을 들고 트럭 주변에서 같이 목소리를 높였다.
집회 현장으로 취재하러 가기 전 인도네시아 방송 매체 간부는 기자에게 "지금 시위가 너무 과격하다"며 "몸조심하라"고 당부했다.
그는 "다른 방송사 카메라 기자가 시위대에 맞아 피를 흘렸다"며 붕대를 머리에 덧댄 사진까지 보여줬다.
실제로 국회의원 특혜에 반대해 지난달 28일부터 시작된 시위는 점점 과격해지는 양상을 보였다. 지금까지 7명이 숨졌다.
지난해 9월부터 하원 의원 580명이 1명당 월 5천만 루피아(약 430만원)의 주택 수당을 받은 사실이 언론 보도로 뒤늦게 알려지며 자카르타에서 시작된 이번 시위는 20대 오토바이 배달 기사가 경찰 장갑차에 깔려 숨지면서 전국으로 확산했다.
국회의사당으로 모이는 시위대들
(자카르타=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지난 1일(현지시간) 오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중심부 스나얀에서 시위대가 국회의사당 정문 앞으로 집결하고 있다. 2025.9.2
인도네시아 금융서비스 업체 '메가 캐피털' 분석가인 라이오넬 프리야디는 블룸버그 통신에 "배달 기사의 죽음이 (시위) 판도를 완전히 바꿨다"며 "이제 정부는 강력한 반엘리트와 반정부 정서에 직면했다"고 말했다.
늦은 밤 시위대는 전국 지방의회 건물 등지에 불을 질렀고, 장관과 국회의원 자택에 침입해 약탈도 서슴지 않았다.
다만 1일 한낮에 찾은 집회 현장에서는 폭도 수준의 과격한 시위대는 보이지 않았다.
시위가 확산한 후 의회가 국회의원 주택 수당 등을 폐지하겠다고 밝히자 최대 학생 연합체인 인도네시아학생집행위원회가 이날 집회에 참여하지 않은 영향도 있는 듯했다.
또 그동안 방화와 약탈은 주로 밤에 벌어졌고, 한낮에는 돌멩이를 던지는 시위대나 최루탄을 쏘는 경찰은 없었다.
기념사진 찍는 집회 참가자들
(자카르타=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지난 1일(현지시간) 오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중심부 스나얀에 있는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집회 참가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2025.9.2
다른 집회 참가자들을 위해 생수를 사서 공짜로 나눠주거나 집회 차량을 배경으로 다 같이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은 한국 집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과 다르지 않았다.
국회의사당 집회 현장에서 만난 대학교 1학년생 라샤는 "오늘 집회에 참여하려고 일부러 찾아왔다"며 "국회의원들은 휴회 기간에도 수당을 받는데 이런 특혜도 없애야 한다"고 강조했다.
주변에는 오토바이 배달을 하다가 잠시 멈추고 집회에 참여한 공유 서비스 업체 '고젝'과 '그랩' 운전기사들도 많았다. 이들 중 일부는 집회 모습을 휴대전화 동영상으로 찍었고, 같이 소리를 지르거나 박수를 치기도 했다.
경찰도 집회 현장 주변에 줄지어서 있을 뿐 별다른 제지는 하지 않았다. 다만 전날부터 국회의사당 주변과 132m 높이의 국가 독립 기념탑인 모나스 인근에는 군인과 저격수가 배치돼 만일의 사태에 대비했다.
"최고 권력은 국민 손에 있다"
(자카르타=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지난 1일(현지시간) 오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중심부 스나얀에 있는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한 집회 참가자가 "최고 권력은 국민 손에 있다"고 쓴 손팻말을 들고 있다. 2025.9.2
1일 밤 자카르타에서는 별다른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았지만, 반둥 등지에서는 시위대가 지방의회 건물에 화염병을 던지는 등 경찰과 또 충돌했다.
지금까지 자카르타에서만 시위대 1천240명이 경찰에 체포됐고, 469명이 다쳤다. 버스 정류소 등이 불에 타 550억 루피아(약 46억7천만원)의 재산 피해도 발생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시위가 어려운 경제 상황으로 불평등이 지속되면서 엘리트층을 향한 분노가 폭발한 현상으로 봤다.
인도네시아는 지난 10년 동안 꾸준히 5%대 경제 성장률을 유지했으나 제조업 분야 일자리 감소로 노동자들 불만이 커지고 있다.
올해 상반기에 공식적으로 해고된 노동자 수는 4만2천명을 넘었고,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2%나 급증한 수치다.
불에 탄 고속도로 요금소 건물
(자카르타=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지난 1일(현지시간) 오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중심부 스나얀에 있는 국회의사당 인근 고속도로 요금소 건물이 며칠 전 시위대 방화로 불에 탄 채 방치돼 있다. 2025.9.2
고질적인 빈부격차도 심각하다.
자카르타 경제법률연구센터의 지난해 보고서에 따르면 인도네시아 최상위 부자 50명의 자산은 5천만명의 총자산과 맞먹는 수준이다.
그랩이나 고젝 운전기사들 가운데 절반가량은 월급 대부분을 생계비로 쓰고 있다.
아디티야 페르다나 인도네시아대학교 부교수는 "사치스럽고 소셜미디어를 통해 과시하면서도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는 서민 고통에는 둔감한 엘리트 계층에 대중이 분노하고 있다"고 짚었다.
그러면서 "이것이 약탈과 같이 강력하고 예상치 못한 반응을 촉발한 원인"이라며 "(프라보워 수비안토) 대통령이 이 심각한 상황을 신속하게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다른 형태의 시위가 (계속) 발생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프라보워 대통령은 1966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해 32년 동안 철권통치를 하다가 1998년 반정부 시위로 하야한 수하르토 전 대통령의 옛 사위다. 옛 장인과 같은 길을 가서는 안 된다는 우려가 자카르타를 뒤덮고 있다.
자카르타 국회의사당 정문
(자카르타=연합뉴스) 손현규 특파원 = 지난 1일(현지시간) 오후 인도네시아 수도 자카르타 중심부 스나얀에 있는 국회의사당 정문 앞에서 경찰관들이 집회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2025.9.2
son@yna.co.kr